|
카테고리
|
2009년 09월 28일
고다르가 위대한 것은 영화사 책에 적혀있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간단한 이유, 시네마틱한 순간들을 매우 독창적으로 창조해냈다는데 있다. 그는 언제나 전투적이고 냉정한 투사였지만 가장 근본적인 영화의 가치가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데 있다는 걸 간과한 적은 없다. 어떤 면에서 그는 트뤼포 보다 더 서정적이고, 더 인간의 감정에 민감했다. 그가 항상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때도 그의 영화는 우리에게 머리로 이해되는 '정치'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정치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남성, 여성>에서 한 여자를 인터뷰하는 매우 긴 숏이 있다. 그 인터뷰는 고다르의 직설적인 정치적 평론이지만, 이상하게도 정말 아릅답다. 그러니까 그는 전혀 난해한 감독이 아니다. 다만 아주 낮선, 이제까지 체험해 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말을 건넬 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전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본래적인 가치를 언제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2009년 09월 27일
이야기 라는게 가능한가? 작가가 인물을 만들고, 행동하게 하고, 이야기를 종결시키는게 가능한 일인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건 글쓰기의 윤리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야기 자체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런게 질문 할 만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긴다. 그러나 이건 레네와 로브 그리예가 영화에서 진지하게 던지는 질문이다. 완전히 낮설지는 않다. 스모킹/노스모킹에서도 양갈래 길에서 끊임없이 분열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완결된 이야기에 대한 회의를 보여준 레네였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1년전의 약속을 추긍하고, 여자는 그 이야기를 '사실'로 확정지으려는 남자에게 저항한다. 여기에 '기억'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끼어든다. 기억은 사실을 확증하는 증거가 되는가? 이런 복잡한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영화의 이야기도 완결되지 않는다. 둘은 다시 1년전의 약속의 지점으로 되돌아 와서 또 다시 반복되는 질문을 할 것 처럼 보인다. '누보 로망' 작가들의 문제의식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할 말들이 지금은 많이 이야기되지 않았나 싶다. 대표적으로 바르트의 '작가의 죽음' 선언,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난 여러 담론들도 적당한 답변이 될 것이고. 바르트를 위시한 일련의 논의를 따라가면, 더 이상 전지전능한 작가의 위치는 없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레네의 영화는 항상 전적인 지지를 보내기는 조금 망설여진다. ('마음'은 제외하고!)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너무나 문학적이라는 것. 이 영화는 그냥 알랭 로브 그리예의 소설같다. 소설을 영화화 한다는 말이 보통이라면, 레네는 영화를 어떻게 소설화 시킬까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시나리오 자체도 영화를 그다지 염두해 두지 않은 거의 독립적인 소설이었을 거란 짐작도 간다. 아이러니한 사실 하나는 레네가 누벨바그의 정신적 스승의 역할을 했다는 것. 양식적인 촬영, 문학적인 시나리오, 이 두가지는 다른 누벨바그리언들이 그토록 배척하고자 했던 것 아니었던가. 2009년 09월 24일
"알다시피 블랑쇼의 관점에 따르면, 언어는 부정이라고 볼 수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을 위해 물질성이 부정된 낱말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어떤 것, 말하자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된다. 사물의 물질적 실재는 관념적인 것으로 바뀌어서 사유의 전체성과 단일성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2장에서 보았듯이 낱말이 글로 쓰였을때 나타나는 부재는 관념이 외부로 표출된 형식이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관념의 퇴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글쓰기는 사물의 부재이자 관념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사유를 보존하고 외부로 표현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유가 단일성과 총체성을 넘어서는 언어를 직면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글쓰기로서의 언어는 소산, 상실, 분산의 경험이며, 이때 언어는 내면에서 나온 생각을 처리해 주는 대신에 그 사유가 '바깥'을 대면하게 한다." 모리스 블랑쇼 by 울리히 하세, 윌리엄 라지 옮겨쓴 문장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문학(글쓰기)는 사물의 부재이자 관념의 부재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쓰여진 낱말들은 기의가 증발한 기표들의 연쇄일 뿐이다. 나는 이것이 문학의 조건이라는데 동의한다. 말들은 작가의 생각을 충실하게 재현하거나 의미나 관념을 실어나르기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문학의 언어는 '무의미'하고 '비인칭적'이고 '중성적'인 것이다. 문학의 언어는 의사소통이나 정보전달 따위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문학의 언어가 그렇게 '무의미' 한 것이라면, 텅 빈 것이라면, 남는 것은 낱말들의 물질성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다. 문학이란 텅 빈 언어를 앵무새 처럼 정말로 '무의미'하게 읊는 것에 불과 한가? 우리는 독서경험을 통해 이 질문에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쓰인 낱말들은 텍스트 바깥의 어떤 관념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낱말들에 연결된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어떤 정보들이 아니라 단일한 해석으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바뀌는 의미다. 또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문학이라는 부재의 공간은 무한한 차이와 잠재성의 공간이라고 말이다. 2009년 09월 12일
이번주 씨네21에 실린 소설가 김중혁의 글은 가장 나쁜 비평의 전형적인 예다.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그는 진부한 것(익숙한 것 이라고 했던가 헤깔린다.) 이라고 썼는데 사실 진부한 것은 바로 김중혁이 영화를 보는 방식이다. 그가 원하는 참신함의 요구란 기존의 익숙한 재현체계 안에서 그것을 조금 세련되게 다듬으라는 요구에 지나지 않는다. 마이클 만은 김중혁이 제시한 문제 설정으로 부터 이미 저 멀리 가 있다. 기존의 체계를 그럴 듯하게 재현해내는것은 그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란 말이다. 비평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텍스트가 어떤 지평위에 무슨 맥락으로 서있는지 부터 점검하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맞든 틀리든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새로운 감각에 둔감하다는 점, 근본적으로 비평의 태도에 있어서 태만하다는 점, 여러모로 화나는 비평이다. 이게 대중적으로 말랑말랑한 칼럼란에 실린 글이라고 해도 용서될 만한 일은 아니다. 2009년 09월 10일
마이애미 바이스를 봤다. 아주 특이한 영화다. 네이버 평점과 imdb 평점은 각각 5점대와 6점대다. 이 평점은 이 영화가 대중적 기대치에 얼마나 못미쳤는가 하는 사실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준다. 납득할 만 한 수치다. 일반적인 장르영화의 기준으로 보면 이 영화는 정말 수준미달인 부분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정성일이 '영화사상 가장 시시한 엔딩' 이라고 말한 엔딩 부분은 물론이고 피상적인 인물, 느닷없는 서사의 진행, 충분이 이해되지 않는 몇몇 관계와 감정들, 도무지 이게 헐리우드의 최고 수준의 인력과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영화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미달인 것 투성인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이 영화는 그냥 졸작으로 평가되어 마땅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른 질문을 하게 만든다. 아니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이 영화의 장르영화로써 수준미달인 부분이 단지 '실패'함으로써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지가 않다는데 있다. 말하자면 마이클 만은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는 '장르영화 작가'다. 고의적이 아닌걸까 싶을 정도로 캐릭터에 대한 감정적 접근을 막아버리고, 장르적 긴장감을 서둘러 수습시키면서 마이클 만은 끊임없이 영화를 밋밋하게 만들어 놓는데 열중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장르적 완성도에 실패한 영화들을 볼 때(예를 들어 디워를 볼 때의 참담함)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특이함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다. 밋밋해지기. 그러나 역설적으로 밋밋함이 발생시키는 묘한 긴장감. 이 이상한 특이함이 계속 질문을 부추긴다. 도대체 이렇게 함으로써 의도하는 것은 뭔가? 장르적 재미를 의도적으로 탈락시키는 이 영화가 주는 이 '재미'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영화를 '실패한' 장르영화로써 접근한 비평들은 그래서 실망스럽다. 새로운 의미는 기존의 재현틀에서 찾아질 수 없다.) 과대평가는 조심해야 하지만 마이클만은 계속해서 질문에 부쳐져야 할 감독임에,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작가임에 틀림없다. |